폭탄을 든 한의사, 독립군을 치료한 한의사 ― 우리가 몰랐던 한의약인의 독립운동
1945년 8월 15일, 한반도는 해방을 맞았다. 그날까지 독립을 위해 싸운 사람들 가운데에는 군인도, 학생도, 교사도 있었다. 누군가는 거리에서 만세를 불렀고, 누군가는 국경을 넘어 독립군이 됐으며, 누군가는 자신의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놓았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에는 사람의 병을 살피고 약을 짓던 이들도 있었다. 한의사와 의생, 약종상 등 한의약계에 몸담았던 사람들이었다.
65세의 한의사는 왜 폭탄을 들었을까
1919년 9월 2일 오후 5시 무렵, 신임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태운 열차가 남대문역, 지금의 서울역에 도착했다. 환영 인파 사이에는 한 노인이 서 있었다. 그의 몸에는 명주 수건으로 감싼 폭탄이 숨겨져 있었다. 사이토가 역을 빠져나와 마차에 오르려던 순간, 노인은 폭탄을 던졌다.
그의 이름은 강우규(姜宇奎, 1855~1920). 당시 나이는 65세였다. 오늘날 강우규는 주로 ‘서울역에서 조선총독을 향해 폭탄을 던진 독립운동가’로 기억된다. 그러나 그의 생애에는 한의전 학생이라면 한 번쯤 눈길이 멈출 만한 또 하나의 이력이 있다. 그는 한의학을 익혀 사람을 치료했던 의료인이었다.

▲ 강우규 의사(1855~1920). 한의술을 익혀 환자를 치료했던 그는 1919년 9월 2일 남대문역에서 신임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향해 폭탄을 던졌다. /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강우규는 한의술을 익혀 생업으로 삼았고, 이후 국권을 빼앗기자 만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한인 공동체를 일구고 학교를 세우는 등 교육과 계몽 활동에 힘썼으며,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대한국민노인동맹단에 참여했다. 그리고 그해 여름, 예순을 훌쩍 넘긴 의료인은 신임 조선총독을 처단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폭탄을 구해 국내로 잠입하고 신문에 실린 사이토의 얼굴을 익혔으며, 남대문역 일대를 여러 차례 살피며 거사를 준비했다. 폭탄 투척 직후에는 현장을 빠져나왔지만 결국 체포됐고, 사형을 선고받아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1962년 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독립군에게도 의사가 필요했다
그러나 한의약인의 독립운동이 모두 강우규처럼 폭탄을 드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는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방법, 즉 사람을 치료하는 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독립운동가 신홍균(申洪均, 1881~?)이다.
대대로 한의업을 이어온 집안에서 태어난 신홍균은 한의학을 익힌 뒤 1911년 북간도로 망명했다. 1915년 봉오동에서 최운산을 만나 훈련 중 질환을 앓던 병사들을 치료했고, 이후 독립군 활동에 참여했다. 1930년대에는 항일무장투쟁의 현장에서 군의관으로 활동한 기록도 남아 있다.
독립군에게 필요한 것은 총과 탄약만이 아니었다. 장거리 이동과 혹독한 훈련을 견뎌야 했고, 부상을 입으면 치료를 받아야 했으며, 감염과 질병 속에서도 다시 움직일 수 있어야 했다. 의약품과 의료 인력이 충분하지 않았던 독립군에게 사람의 몸을 진료할 수 있는 기술은 그 자체로 중요한 자원이었다. 신홍균의 삶은 독립운동사에서 상대적으로 잘 보이지 않았던 역할, 즉 ‘싸우는 사람을 다시 싸울 수 있게 만드는 사람’의 존재를 보여준다.
164명, 독립운동에 뛰어든 한의약인들
강우규와 신홍균은 특별한 예외였을까. 최근 연구를 보면 그렇지만은 않다. 2023년 박경목 충남대학교 연구자가 『한국의사학회지』에 발표한 「한의약계 독립운동가의 활동과 특징」에서는 독립운동에 참여한 한의사·의생·약종상·매약상 등 한의약계 종사자 164명이 확인됐다.
이들의 독립운동은 한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3·1운동에 참여한 이가 있었고, 의병전쟁과 무장투쟁에 뛰어든 사람도 있었다. 만주와 연해주 등 국외 독립운동에 참여한 이들도 있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한의약업에 종사하며 형성한 경제적·사회적 기반을 독립운동에 활용했다는 점이다. 일부는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했고, 사람과 정보를 연결하는 연락 거점 역할을 했다.
이는 당시 의료인의 직업적 특성과도 맞닿아 있다. 환자는 신분과 직업을 가리지 않고 찾아왔고, 의료인은 지역사회 안에서 여러 사람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었다. 진료를 통해 얻은 경제적 기반과 사람의 이동이 빈번한 공간은 때로 독립운동의 자원이 될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진료실은 환자를 치료하는 장소였지만, 다른 순간에는 독립운동가들이 사람과 정보, 자금을 연결하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나라를 잃은 시대, 의료인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이들의 선택은 당시 한의약계가 처했던 시대적 상황과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제강점기는 국가를 빼앗긴 시대인 동시에 조선의 기존 의료체계가 식민지 의료제도 아래에서 급격히 재편되던 시기였다. 1913년 일제가 시행한 의생규칙에 따라 기존의 한의 의료인은 ‘의생’이라는 별도의 지위로 관리됐고, 서양의학을 중심으로 의료제도가 구축되는 과정에서 전통 의료의 제도적 위상도 크게 달라졌다.
하지만 한의약인의 독립운동을 곧바로 ‘한의학을 지키기 위한 투쟁’으로 해석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독립운동에 참여한 개인들의 동기와 활동은 서로 달랐으며, 당시 한의약계 전체가 하나의 정치적 입장을 공유했던 것도 아니다. 다만 지금까지 확인된 164명의 기록은 적어도 하나의 사실을 보여준다. 나라를 잃은 시대에 의료인 역시 자신이 가진 지식과 기술, 돈과 공간, 사회적 관계망을 가지고 각자의 방식으로 시대에 응답했다는 것이다.

▲ 1919년 2월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 1919년은 3·1운동을 비롯해 국내외 독립운동이 크게 확산된 해였으며, 같은 해 9월 강우규 의사의 남대문역 의거가 일어났다. /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독립기념관 소장자료
8월 15일, 다시 기억해야 할 이름들
광복절이면 우리는 총을 든 독립군과 거리에서 태극기를 들었던 사람들, 감옥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던 독립운동가들을 기억한다. 그러나 그 곁에는 다친 사람을 치료한 이도 있었고, 자신이 번 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놓은 이도 있었다. 환자를 만나던 공간을 사람과 정보가 오가는 거점으로 활용한 이도 있었다. 그리고 어떤 한의사는 예순다섯의 나이에 자신이 평생 사용하던 약과 침을 내려놓고 폭탄을 들었다.
강우규와 신홍균, 그리고 기록에서 확인된 수많은 한의약인의 삶을 하나로 묶는 것은 단지 같은 직업을 가졌다는 사실이 아니다. 자신의 지식과 기술, 재산과 관계를 그 시대에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선택했다는 점이다. 한의학의 근현대사는 의학 이론이나 제도가 변해온 역사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그 학문을 배우고 사람을 치료했던 이들이 어떤 시대를 살았고, 그 시대 앞에서 무엇을 선택했는가에 관한 역사이기도 하다.
오늘 우리가 배우는 한의학은 당시와 크게 달라졌다. 의료인이 놓인 사회도, 환자를 치료하는 방법도 달라졌다. 그러나 의료인은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남는다. 광복절을 맞아 우리가 기억해야 할 독립운동가들의 이름 사이에는, 사람의 몸을 돌보던 의료인들의 이름도 있었다.
그들 가운데 한의사도 있었다.

▲ 강우규 의사의 의거 현장 인근에 자리한 구 서울역사. 현재 서울역 광장에는 강우규 의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 Moon, Kweon Woo, Wikimedia Commons, CC BY-SA 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