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대 한의전 ‘2026 동제신춘문예’ 시상식 현장
권강 교수 사재 출연해 5년째… "글쓰기는 타인의 고통에 닿으려는 숭고한 노력"
기숙사 추위서 피어난 소설, 어머니 희생 담은 ‘비누’… 8인의 예비 한의사 ‘치유’를 쓰다
— 수상작과 심사평은 4월 첫째주부터 매주 2편씩 업로드 됩니다.
지난달 25일 오후, 부산대학교 한의학전문대학원(이하 한의전)의 풍경은 평소와 사뭇 달랐다. 두꺼운 본초학 교과서와 침구학 실습 도구 대신, 학생들의 손에는 정갈하게 인쇄된 원고 뭉치가 들려 있었다. 올해로 5회째를 맞이한 ‘2026 동제신춘문예’ 시상식 현장이다.
이 행사는 권강 교수가 “한의학은 단순한 기술이 아닌 인간의 삶을 일구어내는 학문”이라는 신념으로 기획하고 후원해 온 한의전만의 독보적인 문화 행사다. 예비 의료인들이 ‘청진기’를 들기 전 ‘펜’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먼저 들여다보게 하겠다는 취지다. 이날 수상의 영예를 안은 8명의 예비 한의사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글을 쓰는 과정 자체가 스스로를 치유하는 과정이었다”고.

지난 3월 24일, 제5회 동제신춘문예 시상식에서 신상우(왼쪽) 부산대 한의전 교수가 석사 3학년 박현수 학생에게 상장을 수여하고 있다. 이날 박현수 학생은 소설 부문에서 우수상을 수상하였다.
나를 깨우는 23.5도의 온기, 무뎌진 감각을 되살리다
소설 부문 우수작을 수상한 박현수씨의 작품 <23.5°C>는 작년 겨울,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던 차가운 기숙사에서 시작됐다. 그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의 냉랭함이 예상치 못한 영감이 됐다”며 “애써 덮어두었던 못다 이룬 꿈에 대한 마음을 아쉬움 대신 성장의 양분으로 받아들이는 ‘결자해지’의 과정을 담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자극적인 글보다는 “글맛을 돋우는 전채요리 같은 슴슴한 글을 쓰고 싶다”는 포부를 덧붙였다.
시 부문의 신채린씨는 이번 당선을 통해 ‘글을 사랑했던 과거’와 재회했다. 그는 “학창 시절 이후 글자를 고르고 표현을 다듬는 즐거움을 잊고 살았다”며 “무뎌졌던 감각이 다시 살아나는 느낌이 반가웠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서 출발하되, 타인의 모습이 비치는 보편적인 감정의 지점을 건드리는 글을 쓰고 싶다”고 전했다.
어머니의 '비누' 같은 삶, 곁에 있는 이들의 숭고함을 기록하다
가족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긴 작품들도 눈길을 끌었다. 시 부문의 황다예씨는 전업주부로 헌신해온 어머니를 보며 <비누>를 썼다. “자신을 깎아내며 타인을 깨끗하게 해주는 비누의 모습이, 자식을 위해 자신의 이름을 내려놓은 어머니의 삶과 닮았다고 생각했다”는 그는 “스포트라이트 밖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조연’들을 기억하는 글을 쓰겠다”고 다짐했다.
수필 부문의 서은해씨는 편찮으신 외할머니를 간병하며 느꼈던 ‘양가적인 감정’을 <서글픔이란 예우>에 담았다. “사랑하는 가족이 때론 버거운 책임감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꼈다”고 털어놓은 그는, 할머니의 빈자리에서 발견한 정갈한 흔적들을 보며 삶의 유한함을 깨달았다. 그는 훗날 한의사가 되어서도 “세계 곳곳의 치유 지혜를 탐구하는 ‘지구별 여행자’이자 담백한 기록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밝혔다.

지난 3월 24일, 제5회 동제신춘문예 시상식에서 부산대 한의전 석사 1학년 신채린(19기) 학생이 수상작 <송진>을 낭송하고 있다. 해당 작품은 시 부문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싫어하는 영화와 친구가 되는 법, AI 시대에 ‘손 글씨’가 갖는 힘
평론 부문은 문학과 한의학적 담론을 잇는 날카로운 통찰이 돋보였다. 안효주씨는 자신이 별로 좋아하지 않던 연출 스타일의 영화 <결혼 이야기>를 일부러 대여섯 번 반복해서 보며 평론을 썼다. 그는 “싫어하는 것도 기꺼이 취향으로 삼을 수 있을까 하는 실험이었다”며 “영화 속 인물들이 상처를 주고받는 모습을 보며 내 안의 묵은 딱지들을 치유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한의학의 철학을 영어로 옮겨 더 많은 독자와 만나게 돕는 ‘한의학 번역가’가 되고 싶다”는 구체적인 목표를 전했다.
최영주씨는 정세랑 소설을 통해 “다정한 사람들로 인해 다시 살아가게 되는 명랑한 세계관”을 평하며, “AI 시대에 손으로 직접 글을 쓰는 것은 노력 없이는 힘든 일이지만, 그 안에 담긴 온기와 진정성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식만이 아닌 성찰을 나누는 의료인을 꿈꾼다.
우주의 섭리와 점심 메뉴 사이에서… "글쓰기는 세상과의 소통 창구"
해학적인 시선으로 일상을 포착한 이들도 있다. 고성건씨는 시 <우주와 점심 사이>를 통해 거창한 이상의 세계와 당장의 끼니를 걱정하는 현실 사이의 괴리를 담아냈다. “일상의 90%는 장난스럽지만, 글에서 진지한 목소리를 낼 때는 그만큼 깊은 고민이 있다는 신호”라는 그는 “서툰 첫 시작을 기록한 일기장 같은 이 작품을 계기로, 읽는 이의 마음에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이날 신상우 한의전 원장은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시와 소설로 범위를 넓혀가며 5년째 전통을 이어온 것은 우리 대학의 소중한 자산”이라고 치하했다. 차가운 이성으로 병명을 진단하기 전, 문학이라는 따뜻한 렌즈로 인간의 삶을 먼저 응시하는 예비 한의사들. 이들의 펜 끝에서 피어난 문장들이 향후 환자들의 아픈 마음까지 어루만지는 처방전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송엘리 학생기자(18기)